◈5.18 자료(5.18 기념평화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5·18민주화운동은 한때‘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 5·18 묘지로 승격되어 그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되어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5·18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중에게 귀중한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민주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지표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인들에게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광주와 대한민국의 민중은 5·18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으며, 그 정신을 민주·인권·평화·통일 등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제기된 과제로까지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의 중심엔 일제 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 군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으로 개발독재가 이뤄졌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의 여명을 짓밟은 ‘12·12 군사정변’과 ‘5·17’ 계엄 확대
그러나 박정희가 사망한 후,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이 아닌 광주에서도 전개되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민주화운동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19일에 사망했다.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 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군의 등장, 철수하는 계엄군
5월 21일 오전 2시,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오후 5시 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시민군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손뼉 치며
격려하고 있다.
고립된 시민공동체의 항전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되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 전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 든 ‘대한민국 국민’ 독일 인권상 받다.
2017.10.16. 시사저널
"촛불집회, 전 세계에 민주주의 각인"… 특정국가 국민들 수상은 제정 이후 최초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일의 인권상을 수상하게 됐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민주주의를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 특히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가 생동하는 데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는 이 중요한 사실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촛불집회는 독일뿐 아니라 영국, 중국, 일본 등 외신으로부터 ‘역사상 최대 시위’, ‘평화와 축제의 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외신이 가장 주목한 것은 거대 인원이 모인 집회에도 불구하고 폭력사태가 없는 평화 집회를 이어가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독일 언론 디자이트는 “만약 한 시민이 부정과 무능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때,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을 때, 국민들과 국회가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한국에 있다”며 “미국과 유럽은 어떻게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정치 재단으로 1925년부터 그 역사가 시작됐다. 재단의 이름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일 최초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재단 활동은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이자 가치인 자유․정의․연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및 자유노동조합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비영리 기구로 활동하고 있다.
1994년 처음 제정된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은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던 칼․이다 파이스트 부부가 전 재산을 재단에 기탁하면서 만들어졌다. 인권상은 매년 세계 각지에서 인권의 증진에 탁월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되고 있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2만 유로의 상금이 수여된다.
지난해에는 콜롬비아의 유혈분쟁 종식을 위해 투쟁하고, 여권 신장 및 평화 정착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증진시킨 공을 인정받은 콜롬비아 ‘여성평화노선(La Ruta Pacifica de las Mujeres)이 수상했고, 2014년에는 소말리아 엘만평화인권 센터 소장인 파툰 아단 소장이 수상했다. 2013년에는 남동부 유럽 민주주의․화해센터가 수상했다.
그 외에도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한 멕시코의 말 셀 리나 보스티스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건 인권 수호에 기여한 치료행동캠페인(TAC), 인권유린을 밝히고 화해 과정을 지지해 온 칠레와 페루 진실규명위원회 등이 수상한 바 있다.
나라별로 인권을 위해 활동한 개인이나 단체가 이 상을 수상해왔지만, 한 국가의 국민들이 상을 수상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신해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상을 수여받게 될 예정이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새 활력을 불어넣으며 수 주간에 걸쳐 평화적 집회의 권리를 행사해 온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비상국민행동이 상을 수여받게 됐다”라고 밝혔다. 2017년 프리드리히 에버트 인권상 시상식은 12월 5일 베를린에서 열린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중등논술 > 청소년소설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 독서감상문 (5) | 2024.12.04 |
---|---|
중학생 추천도서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줄거리 독서감상문 (11) | 2024.11.04 |
청소년 과학도서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독서감상문 (14) | 2024.10.26 |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 독서감상문 (4) | 2024.10.11 |
[중학생필독서]손원평 소설 아몬드 줄거리, 누가 괴물인가? (1) | 2024.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