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 독서감상문

 소설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은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아시아에서는 여성으로서도 최초로 상을 받은 것이다. 한강 작가는 이미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맨부커국제상을 받아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은 총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소년 동호를 중심으로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당시 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 트라우마를 겪고 사는 광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며 "벌 받는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는 동안 너무 고통스러웠고 벌을 받는 심정이었다. 그 이유는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내 가족 내 이웃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1장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중학교 3학년 동호의 이야기이다. 서술자가 '너'라서 자칫 2인칭 시점인 듯한 낯설음에 당황하며 소설을 읽었다. 너(동호)는 정대의 시신을 찾으로 시신들이 모이는 도청으로 갔고 그 곳에 남아 잔일을 돕게 된다. 전남도청의 상무관에서 함께 시신을 관리하던 은숙누나, 진수형, 선주누나는 차례로 다른 장의 소설의 화자가 된다. 동호는 집에 가자고 찾아온 작은 형과 엄마를 보내고 27일 마지막 까지 그 곳에 있다가 진수형이 자수하면 살 거라고 했는데 자수해서 총 맞아 죽었다.
 
2장은 죽은 정대의 혼이 서술자이다. 평소에 사람이 죽으면 혼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이 많았는데 작가 한강이 나의 의문을 한번에 해소해 주었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다. 혼은 하얀 새같은 것. 사람이 죽으면 몸에서 살짝 빠져나와 시신이 없어질 때까지 간당간당 붙어서 따라다니다 시신이 점점 썩어가면 자기 몸을 혐오해가며 몸에서 점점 떨어져 나온다. 혼은 다른 혼을 느끼지만 서로 대화는 못한다. 자기가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느낌으로 안다. 정대의 혼은 누나 정미가 죽었음을 알았다. 동호가 죽는 날도 동호가 죽었음을 안다. 그리고 자기 몸이 불 태워져 없어지자 자유로이 날아갔다. 어디로 갔을까?
 
3장부터는 동호가 도청에서 같이 지냈던 진수, 은숙 누나, 선주 그리고 동호의 엄마. 그러니까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계엄군에게 패배한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 살아남아서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이들은 풀려났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트라우마.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왜 이 죄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할까? 정작 광주를 그렇게 만든 전두환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골프치러 다니며 잘 먹고 잘 살다가 90살이 넘어서 한번에 고통없이 죽었다. 참 세상이 너무 불공평함에 울분이 터진다.
 
아직도 정치권에서 5.18을 북한군에 의한 폭동이라고 떠드는 국회의원도 있다. 몇년전에는 1980년 당시 미국 정보요원이었던 사람이 나와 5.18은 전두환에 의해 짜여진 시나리오였다는 것이 증언했다. 전두환은 정권을 잡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제일 큰 걸림돌이었던 김대중의 고향이고 서울과 적당히 멀고 사람들의 기질이 다혈질이라 자기들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것이라 판단해서 광주를 찍은 것이다. 사복경찰을 투입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더 격렬하게 시위하도록 만들어 강력한 진압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광주는 북한이 사주해서 시위를 한 곳이기 때문에 철저히 짓밟아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권력자를 위해 아무 죄없이 아무 이유없이 피를 흘려야 했던 사람들, 그 가족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까?

 

 

 

 

◈5.18 자료(5.18 기념평화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5·18민주화운동은 한때‘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 5·18 묘지로 승격되어 그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되어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5·18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중에게 귀중한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민주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지표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인들에게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광주와 대한민국의 민중은 5·18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으며, 그 정신을 민주·인권·평화·통일 등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제기된 과제로까지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의 중심엔 일제 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 군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으로 개발독재가 이뤄졌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의 여명을 짓밟은 ‘12·12 군사정변’과 ‘5·17’ 계엄 확대
그러나 박정희가 사망한 후,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이 아닌 광주에서도 전개되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민주화운동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19일에 사망했다.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 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군의 등장, 철수하는 계엄군
5월 21일 오전 2시,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오후 5시 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시민군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손뼉 치며
격려하고 있다.
 
고립된 시민공동체의 항전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되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 전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 든 ‘대한민국 국민’ 독일 인권상 받다.
       2017.10.16. 시사저널
 
"촛불집회, 전 세계에 민주주의 각인"… 특정국가 국민들 수상은 제정 이후 최초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일의 인권상을 수상하게 됐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민주주의를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 특히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가 생동하는 데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는 이 중요한 사실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촛불집회는 독일뿐 아니라 영국, 중국, 일본 등 외신으로부터 ‘역사상 최대 시위’, ‘평화와 축제의 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외신이 가장 주목한 것은 거대 인원이 모인 집회에도 불구하고 폭력사태가 없는 평화 집회를 이어가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독일 언론 디자이트는 “만약 한 시민이 부정과 무능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때,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을 때, 국민들과 국회가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한국에 있다”며 “미국과 유럽은 어떻게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정치 재단으로 1925년부터 그 역사가 시작됐다. 재단의 이름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일 최초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재단 활동은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이자 가치인 자유․정의․연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및 자유노동조합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비영리 기구로 활동하고 있다.

1994년 처음 제정된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은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던 칼․이다 파이스트 부부가 전 재산을 재단에 기탁하면서 만들어졌다. 인권상은 매년 세계 각지에서 인권의 증진에 탁월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되고 있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2만 유로의 상금이 수여된다. 

지난해에는 콜롬비아의 유혈분쟁 종식을 위해 투쟁하고, 여권 신장 및 평화 정착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증진시킨 공을 인정받은 콜롬비아 ‘여성평화노선(La Ruta Pacifica de las Mujeres)이 수상했고, 2014년에는 소말리아 엘만평화인권 센터 소장인 파툰 아단 소장이 수상했다. 2013년에는 남동부 유럽 민주주의․화해센터가 수상했다. 

그 외에도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한 멕시코의 말 셀 리나 보스티스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건 인권 수호에 기여한 치료행동캠페인(TAC), 인권유린을 밝히고 화해 과정을 지지해 온 칠레와 페루 진실규명위원회 등이 수상한 바 있다.

나라별로 인권을 위해 활동한 개인이나 단체가 이 상을 수상해왔지만, 한 국가의 국민들이 상을 수상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신해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상을 수여받게 될 예정이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새 활력을 불어넣으며 수 주간에 걸쳐 평화적 집회의 권리를 행사해 온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비상국민행동이 상을 수여받게 됐다”라고 밝혔다. 2017년 프리드리히 에버트 인권상 시상식은 12월 5일 베를린에서 열린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운수 좋은 날>은 1924년 6월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 소설이다. 1920년대 전반기 서울을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린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이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 첨지의 하루를 그린다. 비오는 날 김 첨지는 돈을 많이 버는 행운을 얻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과 맞닥트린다.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가장 운수가 없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장 비극적인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반어적으로 부름으로서 이 작품이 지닌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운수 좋은 날>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작품 전체에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주인공을 둘러싼 빈곤과 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 첨지의 아내가 먹고 싶어 하던 설렁탕은 값비싼 음식이 아니라 당시 서민들이 즐기던 음식이었다. 김 첨지의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그토록 소원했던 것이 설렁탕이라는 것은 그 소원이 지니는 소박함만큼이나 이들의 극한 가난을 드러낸다.

 

줄거리

추적추적 비 내리는 겨울날, 인력거꾼 김첨지는 아픈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을 나왔는데 아침부터 손님이 계속 이어지는 행운을 얻는다. 행운이 계속되지만 병으로 누워있는 아내 걱정으로 마음은 불안하다. 돈이 없어 약한번 사다 먹이지 못하는 아내가 오늘만은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집 근처를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집에 가는 길이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를 만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술을 마시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집에 갔는데 아내는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젖먹이 아이는 죽은 엄마의 빈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 김첨지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하고 울부짖는다.

 

운수 좋은 날 시대적 상황 

1920년대는 일제의 수탈로 조선의 전 민중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던 시기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간도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흘러들어 값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부랑자가 되었다. 1926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나날이 닥쳐오는 생활난으로 만주의 광야를 향하여 북으로 북으로 멀리 축출되는 백의민족의 무리가 해를 따라 증가된다. 올해에는 경기도 양평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각처에서 이주하는 사람이 다수였음을 보도하였지만, 그들은 고국에서는 명을 이을 수 없음으로 산천이 다른 저 이역에서 활로를 찾기 위하여 서북간도로 향하는 도중 혹독한 대륙의 한풍에 무참히도 동사하는 일이 누누히 있다.
 
1926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

 

 

운수 좋은 날 독서감상문

 

제목: 일제강점기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의 수탈로 조선의 전 민중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던 시기인 1920년대이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신고 되지 않은 토지는 국유지로 만들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소작농들 또한 턱없이 오른 소작료에 인해 더 이상 농촌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농민들은 간도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흘러들어 값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부랑자가 되었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 첨지도 이 시기에 도시로 흘러들어와 인력거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이다.  요즘은 전차까지 생겨서 인력거 타는 손님이 줄어 열흘동안 공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겨울 날 돈을 많이 버는 행운이 잇따른다. 행운이 계속되지만 병으로 누워있는 아내 걱정으로 마음은 불안하다. 돈이 없어 약 한 번 사다 먹이지 못하는 아내가 오늘만은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집 근처를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집에 가는 길이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를 만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술을 마시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집에 갔는데 아내는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을 했다. 나는 가난은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2024년인 지금이야 복지가 잘 되어있고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대에는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면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을 빚을 갚거나 농사를 짓고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아가야 했다. 신분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정해지던 시대였다. 물론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아픈아내에게 막대한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김첨지의 가난이 모두 개인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김첨지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뼈가 빠져라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가난의 원인이 아닌 가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청주 서경중 윤OO

 

 

 
소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은 중학생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책입니다. 
미국 소설이지만 우리나라 중학교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악플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사이버 폭력에 대한 문제가 큽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연예인들도 악플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은>을 읽고 악플도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의 심정을 공감하며 건강한 인터넷 생활을 해주길 바랍니다.
 

사이버 폭력에 관한 기사

 

소리 없는 흉기 '악플' 공세…연예인 일반인 안 가린다
[중앙일보] 입력 2020.11.03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직장인 이모(37ㆍ여)씨는 외모를 평가하는 등 악성 댓글로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 씨는 3일 “남성으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이 폭력적 수준의 악플을 달아 힘들었다”며 “악플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잊힐만하면 계속 생각이 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를 지키기 위해 채널을 닫을까도 생각 중”이라며 “고소를 결심했지만 생각보다 절차가 너무 복잡해 포기했다”라고 덧붙였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도 있다. 서울 혜화경찰서 등에 따르면 서울 모 여대 재학생이 지난달 8일 에브리타임의 악성 댓글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울증을 앓던 이 학생은 여러 차례 심경을 비관하는 글을 올렸지만 “티 내지 말고 조용히 XX” 등의 악성 댓글이 이어졌다. 숨진 학생 유족은 지난달 23일 악플을 남긴 이용자들을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일반인 대상 악플은 처벌 더 어려워   
공인은 물론 일반인의 악성 댓글 피해가 증가하는 건 인터넷 공간의 개방적 특성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인터넷이 새로운 공론장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악성 댓글이 일반인에게까지 퍼질 만큼 만연해졌다”며 “네이버가 연예 댓글을 폐지했다고 하지만 다양한 SNS 유통 경로가 있기 때문에 ‘풍선 효과’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받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공인보다 일반인은 악성 댓글 작성자를 처벌하기가 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는 “악성 댓글로 고소하는 사례가 많지만 작성자를 특정하는 게 쉽지 않다”며 “수사기관에서 여러 차례 압수 수색을 나가야 하는 등 수사도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품이 많이 드는데 비해 처벌은 크지 않아 사회적 공분을 사거나 유명인 건이 아니면 수사가 잘 안 된다”며 “그래서 고소인이 마음고생 하는 경우가 꽤 있다”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악성 댓글은 피해자를 낳는다는 걸 네티즌들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악플을 써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한시적으로 실명제를 도입하거나 악플로 인해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공감 능력을 향상해 주는 제도적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권상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게시판 관리자가 피해를 줄 수 있는 자극적 글을 걸러낼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현주 기자 

출처: [중앙일보] 소리 없는 흉기 '악플' 공세… 연예인 일반인 안 가린다 2020.11.3일 기사

 


작가 소개

도리 H. 버틀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청소년. 아동문학 작가 중 한 명으로, 청소년의 섬세한 심리와 감수성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네소타 출신으로 대학에서 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다. 현재 신문, 잡지에 청소년 및 어린이 소설을 연재하고 있으며 학교 글짓기 프로그램 초빙 강사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줄거리

  중학교3학년 제이비는 트루먼 중학교 교내 신문부 부장을 맡고 있으며, 장래에 신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획일적인 학교교육과 사사건건 선생님이 간섭하는 신문 제작 방식에 불만을 품은 제이비는 신문부를 그만두고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한 신문을 꿈꾼다. 그리하여 컴퓨터를 잘 다루는 친구 아무르와 함께 독자적으로‘트루먼의 진실’이란 웹사이트를 만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인기 스타인 릴리의 뚱뚱했던 초등학교 시절 사진과 그녀를 비장하는 익명의 글이 올라오면서 ‘트루먼의 진실’은 한바탕 소동에 휩싸이게 된다. 밀크&허니라는 아이디를 쓰는 익명의 발신자가 올린 비방글의 악영향은 교내 학생들에게 일파만파 번져, 릴리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에게까지 왕따를 당한다. 더군다나 다른 학생들까지도 릴리에게 악플 공세를 퍼붓는 바람에, 릴리는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
  이 모든 사건이 자신이 만든 웹사이트 때문인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제이비는 사이트를 닫고 아무르와 함께 사라진 릴리를 나서는데 옛날에 같이 놀던 숲 속의 오래된 나무집에서 릴리를 발견한다.
  브리아나는 ‘안티 릴리 카페’와 ‘리리의 레즈비언 일기장’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정학을 당했고 릴리는 밀크&허니가 트레버라는 것을 알고 만나서 사과한다. 제이비와 아무르는 릴리와 함께  <트루먼의 진실> 사이트를 폐쇄하고 왕따에 관해 얘기하는 토론장을 만들기로 한다.
  출처: yes24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독서감상문

제목: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트루먼 스쿨 악플사건을 읽고)

 트루먼스쿨에서 일어난 악플사건은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설에서 트루먼 스쿨의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며 은폐하거나 왕따의 원인을 왕따를 당하는 아이에게서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왕따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얼굴이 못생겨서, 종교가 달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왕따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국도 한국처럼 학교폭력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릴리 패거리들이 피해자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며 어쩌면 우리나라보다 폭력의 강도가 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르는 종교가 이슬람교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은따를 당한다. 만약 내가 아무르였다면 나의 종교를 부끄러워하고 숨겼을 것 같은데 자신의 종교를 창피해하지 않는 아무르가 자존감이 높아 보였다. K-pop을 좋아하는 덕질러들은 겨울을 추운 계절이라 부른다. 단순히 날씨가 추워서가 아니라 많은 아티스트들이 추운 겨울에 하늘의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쓴 댓글  한 마디에 그 댓글을 받은 사람은 잠을 잘 때조차 고통을 받는다. 그러니 인터넷상에 내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더욱더 조심히 댓글을 쓰고 소통했으면 좋겠다. 
  
중1학년 윤 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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