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은 1924년 6월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 소설이다. 1920년대 전반기 서울을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린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이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 첨지의 하루를 그린다. 비오는 날 김 첨지는 돈을 많이 버는 행운을 얻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과 맞닥트린다.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가장 운수가 없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장 비극적인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반어적으로 부름으로서 이 작품이 지닌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운수 좋은 날>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작품 전체에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주인공을 둘러싼 빈곤과 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 첨지의 아내가 먹고 싶어 하던 설렁탕은 값비싼 음식이 아니라 당시 서민들이 즐기던 음식이었다. 김 첨지의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그토록 소원했던 것이 설렁탕이라는 것은 그 소원이 지니는 소박함만큼이나 이들의 극한 가난을 드러낸다.

 

줄거리

추적추적 비 내리는 겨울날, 인력거꾼 김첨지는 아픈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을 나왔는데 아침부터 손님이 계속 이어지는 행운을 얻는다. 행운이 계속되지만 병으로 누워있는 아내 걱정으로 마음은 불안하다. 돈이 없어 약한번 사다 먹이지 못하는 아내가 오늘만은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집 근처를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집에 가는 길이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를 만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술을 마시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집에 갔는데 아내는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젖먹이 아이는 죽은 엄마의 빈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 김첨지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하고 울부짖는다.

 

운수 좋은 날 시대적 상황 

1920년대는 일제의 수탈로 조선의 전 민중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던 시기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간도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흘러들어 값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부랑자가 되었다. 1926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나날이 닥쳐오는 생활난으로 만주의 광야를 향하여 북으로 북으로 멀리 축출되는 백의민족의 무리가 해를 따라 증가된다. 올해에는 경기도 양평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각처에서 이주하는 사람이 다수였음을 보도하였지만, 그들은 고국에서는 명을 이을 수 없음으로 산천이 다른 저 이역에서 활로를 찾기 위하여 서북간도로 향하는 도중 혹독한 대륙의 한풍에 무참히도 동사하는 일이 누누히 있다.
 
1926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

 

 

운수 좋은 날 독서감상문

 

제목: 일제강점기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의 수탈로 조선의 전 민중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던 시기인 1920년대이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신고 되지 않은 토지는 국유지로 만들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소작농들 또한 턱없이 오른 소작료에 인해 더 이상 농촌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농민들은 간도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흘러들어 값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부랑자가 되었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 첨지도 이 시기에 도시로 흘러들어와 인력거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이다.  요즘은 전차까지 생겨서 인력거 타는 손님이 줄어 열흘동안 공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겨울 날 돈을 많이 버는 행운이 잇따른다. 행운이 계속되지만 병으로 누워있는 아내 걱정으로 마음은 불안하다. 돈이 없어 약 한 번 사다 먹이지 못하는 아내가 오늘만은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집 근처를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집에 가는 길이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를 만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술을 마시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집에 갔는데 아내는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을 했다. 나는 가난은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2024년인 지금이야 복지가 잘 되어있고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대에는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면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을 빚을 갚거나 농사를 짓고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아가야 했다. 신분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정해지던 시대였다. 물론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아픈아내에게 막대한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김첨지의 가난이 모두 개인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김첨지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뼈가 빠져라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가난의 원인이 아닌 가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청주 서경중 윤OO

 

노새 두 마리 작품 소개

  1970년대 산업화의 시대 서울 중심도로에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울 변두리에 말도 아닌 노새를 끌며 연탄을 배달하는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 시골에서도 말 마차를 끌던 마부였습니다. 휘황찬란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연탄 마차를 끌며 뒤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런데 어느 날 연탄을 배달하던 중 노새가 달아납니다. 결국 노새를 찾을 길이 없어 망연자실할 무렵 달아난 노새가 '나'의 꿈처럼 온 동네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바람에 아버지는 경찰서로 소환됩니다.

  노새가 서울 도심의 골목에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지듯, 그 노새를 끌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 역시 시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어딘가 어긋나 버린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눈에는 번식 능력도 없고 도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새로 보입니다. 

 

독서토론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노새 두 마리'를 읽고 "가난이 개인의 책임인지 사회의 책임인지" 토론하고 글쓰기를 했습니다.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최일남 소설 "노새 두 마리"를 읽고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로 농촌 경제가 무너져 아버지와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 올 수밖에 없었다.  평생 시골에서만 살던 아버지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마부였던 것을 되살려 말은 아니지만 더 싼 노새를 끌고 할 수 있는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는 계속 발전하여 연탄을 트럭으로 배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아버지의 수입은 계속 줄 수밖에 없다.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고소득은 자본과 경쟁력을 갖춘 소수만이 얻게 되고 경쟁에서 도태되는 나마지 사람들은 저임금 저소득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다. 이런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지금은 1970년대와는 달리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이 많지만  저소득층이 도태되지 않도록 정부나 사회에서 관심을 갖어야 우리 사회는 더 안전해질 것이다.

청주 가경중 2학년 황OO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가난은 사회에게도 개인에게도  다 책임이 있지만 개인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회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도시화가 되어왔다. 그러면서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시골에 있는 농민들의 생계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 경제적 차이로 날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사회의 변화가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든 이유도 있다. 하지만 개인도 스스로 노력을 하여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물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평등하고 고소득의 직업을 갖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스스로 성실하게 노력을 한다면 사회의 평균적인 생활을 누릴 수는 있다. 또 개인의 가난을 불러오는 일차적인 원인은 근로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는데도 노력하지 않은 게으름에 있다. 또 도박과 게임 같은 중독이 심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개인의 나태함과 무절제한 생활습관은 가난의 악순환을 부르는 큰 원인이 되므로 사회와 개인의 서로 노력을 해야 한다.

청주 서경중 2학년 김 OO

 


<허생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담겨있는 한문 소설이다. [열하일기]는 조선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의 사신 행렬에 합류해 청나라 열하까지 갔다 와서 쓴 기행문이다. <허생전>은 [열하일기]의 '옥갑야화'에 실려 있다. '옥갑야화'는 옥갑이라는 곳에서 여러 비장들과 밤에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대화 도중 변승업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자 박지원이 이와 관련하여 윤영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며 허생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작품 속 인물 허생을 통해 현실에는 아무 이득이 없는 성리학 공부만 하는 양반층과 말로만 북벌을 부르짖는 지배층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담고 있다. 현실 불가능한 북벌론 대신 북학 사상을 주장한 박지원이 사상이 압축된 소설이 바로 <허생전>이다.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은 1737년 한양에서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이보천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내의 숙부를 스승으로 삼았다. 사마천의 <항우본기>를 본떠 <이충무공전>을 지었는데 사마천 같은 글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박지원의 집안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서인 노론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벼슬길이 열려 있었는데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망설였다. 20대에는 우울한 청년기를 보내면서 '마장전', '예덕선생 전', '광문자전', '김신선전', '우상전', '민옹전', '양반전'등이 실려있는 <방경각외전>을 지었다. 
 2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연달아 실질적 보호자이면서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별세하시고 31세에는 자신이 지극히 봉양하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백탑 근처로 이사해 당대 최고 학자인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등과 사귀면서 지냈다. 42세에는 당시 세력가에게 미움을 사서 황해도 연암골로 몸을 피신하기도 했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로 갔다 온 뒤 <열하일기>를 쓴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서고 55세에는 안의 현감으로 부임해 <열녀함양박씨전>등 여러 작품을 남겼고 61세에는 충청도 면천군의 군수가 되어 백성의 농사일을 살피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를 써서 토지 개혁을 제안하고 농법을 소개했다.
 
연암 박지원은 실학자 중에서도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며,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사신으로 가는 친척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그곳의 발전한 모습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청나라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보다는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술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박지원은 이러한 청나라의 생활상과 그곳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쓴 <열하일기>를 펴냈다. 이후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 계획이 퍼져 있을 때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들여오자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허생전의 줄거리

허생은 남산 아래 묵적골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았다. 허생은 7년 동안 글 읽기만 좋아하고 아내가 삵바느질을 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참다못한 허생의 아내가 울며 푸념을 하자 허생은 책 읽기를 중단하고 집을 나갔다.
허생은 서울 장안에서 제일 부자인 변 부자에게 돈 만냥을 빌려 곧장 안성으로 가서 대추, 감, 배, 석류, 유자 따위의 과일을 몽땅 사서 창고 깊숙이 넣어 두었다. 잔치나 제사를 지내려 해도 과일이 없으니 과일 장수들은 허생에게  과일을 팔라고 통사정을 하자 처음 값의 열 배를 받고 과일을 되팔았다. 그다음 칼, 호미, 실, 베, 솜 따위를 모조리 사들여 제주도에 가서 그것을 팔아 말총이란 말총은 모두 거두어들였다. 말총은 갓과 망건을 만드는 재료였다. 얼마 가지 않아 나라의 갓값과 망건값이 열 배로 올라 허생은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되었다.
큰 재산을 모은 허생은 경험이 풍부한 뱃사공을 통해 쓸 만한 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변산 지방에 있던 도적 떼를 불러 모은 다음 이들에게 아내를 얻어 주고 집과 소를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30만 냥을 갖고 나타난 허생은 도적들에게 각각 100냥씩을 나눠 주고 여자와 소를 구해 오도록 지시한 후 이들을 섬에 정착시켰다. 수확한 곡물을 팔아 은 100만 냥을 벌었다.
허생은 섬에서 지켜야할 예의범절과 양보의 미덕을 가르치고 자기가 타고 갈 배 한 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은 백만 냥 중 오십만 냥도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글을 아는 사람들은 모조리 배에 태워 함께 조선으로 왔다.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허생은 오십만 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고도 십만 냥이 남아 변부자에게 돈을 갚았다. 변부자는 이완 대장에게 허생을 인재로 추천하였고 어영대장이 허생에게 인재를 구할 방도를 구하자 허생은 세 가지 방책을 제안했는데 이완대장은 다 수용할 수 없음을 밝혔다. 허생은 사대부 기득권층을 비판하고 이완 대장을 질책하였는데 다음 날, 종적을 감췄다.  
 

 

허생전의 사회, 문화적 배경

허생의 말과 행동을 바탕으로 허생전의 시대적 배경이 된 조선후기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 허허, 겨우 만 냥으로 나라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으니, 이 나라 형편이 어떤지 알 만하구나"

 
허생이 만 냥으로 과일과 말총을 사서 매점매석하여 돈을 번 후 " 허허, 겨우 만 냥으로 나라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으니, 이 나라 형편이 어떤지 알 만하구나" 라는 말을 통해 그 당시 유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물건을 독점하거나 모아서 사들이는 사재기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외국과의 무역이 적고 수레를 이용한 물건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한 가지 물건을 독점하면 물건 값이 크게 올라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옛날 명나라에 입은 은혜가 있다고 해서,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한 뒤에 명나라의 많은 자손들이 우리나라로 망명해 와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다고 들었소."
"지금 청나라가 천하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중국 사람들과는 친하지 못한 판이니, 다른 나라보다 먼저 항복을 한 우리나라를 제일 믿고 있을 게 아니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다. 조선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 준 청나라에 복수하려고 하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을 정벌해야 한다며 북벌 계획을 주장하였다. 허생의 말은 그 계획의 허구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당시의 기득권 계층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그 사대부란 놈들이 도대체 어떤 놈들이냐? ...... 장차 말타기, 칼 쓰기, 창 찌르기, 활쏘기에 돌팔매질까지도 익혀야 할 판국에 그 넓은 소매 옷을 고쳐 입을 생각은 않고 예법만 찾는단 말이냐? 내가 벌써 세 가지씩이나 그 방도를 일러 주었는데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니, 그러면서도 네가 신임받는 신하라고 할 수 있느냐?"

 
당시 양반들은 예법만 찾고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배우지 않았다. 허생과 이완 대장의 대화에서 박지원은 현실적인 제안과 이익보다 명분과 예법을 중시하는 당시의 양반 계층 비판을 하고 있다.
 
 
 

 

 
소설 노새 두 마리는 1970년대 도시화,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삶을 산 도시 하층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아이인 '나'를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버지의 고달픈 삶을 그리고 있다.
 

작가 최일남

(1932~   )
전북 전주 출생. 1953년 [문예]에 <쑥 이야기>가, 1956년 [현대문학]에 <파양>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일했다. 최일남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소위 말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 소설의 인물들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흐르는 북>, <타령>, <노새 두 마리>, <장씨의 수염> 등이 있다.
 

소설의 줄거리

생계 수단을 노새를 이용해 연탄 배달을 하는 '나'의 가족은 도시 변두리에서 어렵게 생활한다. 그러다 새 동네가 생기면서 연탄 배달 주문도 늘어 좋았는 데 어느 날 노새가 달아나 버린다. 생계가 걸린 노새가 도망가 버린 이 상황에서 아버지와 '나'는 노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우리 가족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연히 들른 동물원에서 '나'는 아버지가 일만 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노새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 역시 "이제는 내가 노새다"라고 말하면서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게 결심하고 귀가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이다. 도망친 노새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경찰서로 오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아버지와 노해 모두 도시적 삶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힘겨운 일임을 깨달으며, 언젠가 이웃이 했던 "비행기, 헬리콥터,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도시에서 노새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떠올린다.
 
발단 - 새 동네가 들어서면서 동네에는 여러 변화가 생김
 
전개 - 새 동네 사람들과 구동네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새 동네 사람들은 '노새'를 신기하게 여김
 
위기- 연탄 배달을 하던 중 '노새'가 도망치고 아버지와 나는 노새를 찾아 나서지만 찾지 못함
 
절정- 노새가 멀리 도망치는 꿈을 꾼 '나'는 다음 날 노새를 찾던 중에 들어간 동물원에서 아버지와 노새가 닮았다고 생각함
 
결말 - 자신이 노새가 되겠다며 웃던 아버지는 노새가 입힌 피해 때문에 순경이 찾아왔었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감
 

소설에 반영된 사회. 문화적 상황

 
문학 작품에는 창작 당시의 모습이 반영되기 때문에 문학 작품을 읽으면 당시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노새 두 마리>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970년대 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다는 것, 연탄을 때는 집들이 있다는 것, 마차가 점차 사라지고 삼륜차가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들 수 있다. 또한 판잣집들과 문화 주택이 들어서며 동네가 형성되는 것을 보면 소설의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

  • 변두리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난했다.
  • 가정에서 연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 산업화, 기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이 있었다.
  •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노새와 아버지의 상징적 의미

 
노새와 아버지는 닮은 점이 많다. 노새는 연탄 때가 묻어 털이 검은빛을 띠고 있고 아버지도 연탄 때가 묻어 노상 시커먼 몰골을 하고 다닌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는 노새와 노새를 끌고 힘겹게 연탄 배달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아버지의 삶도 같다. 또한 자동차가 증가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도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점점 소외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닮았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노새'와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존재를 의미한다.
 소설에서 노새는 한 마리만 나온다. 하지만 왜 제목이 '노새 두 마리' 일까?  '노새 두 마리'는 '나'의 가족이 기르던 노새와 '나'의 아버지를 뜻한다. 아버지도 노새와 다름없이 도시화와 산업화에 뒤처진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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